트릴로지 전

* : 필수항목
아티스트 고산금, 유봉상, 홍성철
장소 021갤러리, 대구
전시명 트릴로지 전
전시시작일 2017-04-07
전시종료일 2017-05-06

확신과 의문 사이를 오가는 추

A Pendulum swings from Affirmation to Interrogation.

트릴로지(Trilogy): 고산금, 유봉상, 홍성철

이돈수 (021 갤러리 관장)

021 갤러리 개관전 기획

021 갤러리에서는 이번 4월 전시로 <확신과 의문> 이라는 주제로 세 작가(고산금, 유봉상, 홍성철)의 작품을 모아 준비했다. 전시될 작품은 회화라는 틀 안에서 영롱한 인조 진주, 탄력 있는 실, 그리고 단단한 못이라는 물성을 중심으로 작업한 작품이다. 각자 오랫동안 한 물성에 천착해 진행해 온 작업활동은 전통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에 개방성과 확장성을 부여했다. 또한 물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사용에서 배어 나오는 원숙미와 완벽미는 관람자의 시각을 정복하고 감각을 유혹한다.  

모든 텍스트와 그 의미를 삼켜버리는 진주 알, 이미지를 픽셀화하여 해체 시키는 못, 이미지를 TV의 주사선처럼 줄무늬화하여 분해 시키는 실은 제 역할이 있다. 사각의 화폭 위에 중첩되어 작품에 사용된 물성은 모두 이미지와 의미를 지우고, 해체 시키고, 분해한다. 이질성이 강한 물성은 회화와 결합하여 의미를 지우고 경계를 지우는 동시에, 의미 없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경계가 없는 것들에 경계를 만들어 낸다. 이질적 물성이 만들어 내는 시각적 표면의 이중성은 표면 구성의 차원을 넘어 보는 이들의 인식 속으로 파고 들어가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작품 해석에 있어 긴장감과 재미를 유발한다.

작가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 안에서 자기 확신(self-affirmation)과 질문(self-interrogation)의 반복을 통한 자기 정체성(self-identification) 파악의 과정을 각자의 표현 방법으로 작품에 투영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들은 삶의 모습과 개인적 경험을 저마다의 다른 물성으로 작품에 각인한다.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고 또 되묻는 쉼 없는 과정을 시각적 은유로 담아내고 있는 작품에서 작가의 자기 정체성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확신과 의문을 엿볼 수 있다. 확신과 의문을 오가는 시계추와 같은 작품 앞에 선 관람자는 자신의 현실을 작품에 투영시켜 끊임없이 마주치는 자기 정체성, 그리고 현실에 대한 확신과 의문에 대면하게 된다.  

 

고산금

고산금의 작품은 작가의 일상을 연상케 한다. 첫 잔의 커피와 신문, 작업실 책상 위에 무심히 놓여있는 두꺼운 책, 침대 머리맡 희미한 조명 아래 흐트러진 잡지와 같은 읽을거리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아날로그 텍스트인 종이 위에 인쇄된 시, 소설, 신문, 잡지 등 모든 활자 매체는 그가 즐겨 하는 작품의 주제가 된다.

텍스트를 언급함에 있어 기표(signifier: 단어의 소리)와 기의(signified: 의미되는 내용)의 자의적(arbitrary) 관계를 설명한 언어학자 페르디낭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이론을 빠트릴 수 없다.

『레미제라블2 (빅토르 휴고/Penguin), 부분발췌 Pp. 338-369』, 『This Changes Everything; Capitalism vs. The Climate(Naomi Klein/ Simon & Schuster), 부분발췌 Pp. 337-359(국문번역본 없음으로 영문 표기 함)』, 『경향신문 2015. 05, 13. 섹션 18.19(안심대출 외)』,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작, 40-65page)』, 『너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와 같은 작품의 제목들은 작가가 꼼꼼하게 선택해 낸 기표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기표로서 제목이 지시하는 대상, 의미의 영역인 기의는 인쇄된 아날로그 텍스트이거나 문학 작품과 같은 동적인 내레이션의 한 조각이다. 즉, 한 조각의 텍스트는 컨텍스트(context) 속에 기의로써 존재하며, 문맥의 의미론적 맥락 안에서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작업의 주제로 이러한 의미작용을 하는 텍스트를 선택하여 텍스트를 이루는 글자 하나 하나를 어떠한 뜻도 담을 수 없고, 또한 소통의 기호조차 될 수 없는 물체인 인조 진주로 대치시켰다. 작가는 이미 탈문맥화 된 텍스트에 진주라는 물성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생성시킴으로써 새 생명과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조형적 요소가 강조된 회화 작품으로 재문맥화 시켰다.  

작가는 텍스트가 가지는 동적인 내레이션을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 알갱이를 이용하여 정적인 이미지로 결정화시켰다. 텍스트 상에서 하나의 글자가 있는 곳에 진주 한 개를 붙이고, 글자가 없는 곳은 캔버스에서도 여백이 된다. 이는 마치 디지털 세계를 지배하는 이진법과 같은 원리의 작업이다. 작가에게 선택된 아날로그 텍스트는 그것이 가지는 원래의 의미가 분해, 해체된 후 디지털화되어 결국 차가운 픽셀 아트와 같은 조형미를 띠게 된다. 이제 복잡한 의미 구조를 지닌 기호로서 텍스트는 미니멀한 이미지로 다시 태어나 본래의 의미 체계와 상관없는 또 다른 차원의 소통 언어로 변환되었다. 그 결과 작품은 보는 사람 모두는 원래의 텍스트가 가지는 의미에서 벗어나 저마다의 다양한 방법으로 그림을 볼 수 있게 된다.

 이제 작품은 천 명의 사람이 봤을 때 천 가지 해석이 가능한 천의 얼굴을 가지게 되었고, 이렇게 다양한 해석은 관람자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작품의 조형적 특징은 기표가 제시하는 텍스트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그림들은 기표인 제목과 관계를 맺고 연결되어 있다. 그 결과 관람자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인 “기의”는 고산금이 만들어 낸 “기표”인 제목 밑으로 끝없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여기서 고산금은 원본 텍스트와 무관한 시각 이미지로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작가로 다시 태어난다. 마치 작곡가가 감명 깊은 시나 소설 또는 일상의 텍스트를 주제로 음악을 만들 듯. 오페라 공연에서 관객들은 굉장히 부도덕적인 장면에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내기도 하지 않는가! 곡의 내용을 떠나 다만 그 성악가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취해……

 

유봉상

유봉상은 약 20년간 프랑스에서 작업에 몰두해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 낸 경륜 있는 작가다. 그는 못을 회화 작업에 사용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명료하게 작업된 형상 위에 수 만개의 얇은 못을 박은 후, 표면을 높낮이가 다르게 그라인더로 갈아 낸다. 못 머리가 잘려나가면서 갈린 못의 표면은 빛과 만나 신비한 반짝임을 연출해 낸다. 빛나는 금속의 표면과 그 아래 깔려있는 형상과 색의 만남이 만들어 낸 작품의 아우라(Aura)는 실제로 작품을 보기 전까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핸드폰을 든 사람을 그린 작품을 멀리서 바라 봤을 때, 나는 화면이 못으로 작업된 것이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촘촘히 박혀 물결치는 듯한 못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트롱프뢰유(tromp-l'oeil, 눈속임 기법)란 이런 것 이구나 하고 잠시 생각하는 순간 드러나는 못의 반짝임은 시각과 함께 촉각까지도 자극하였다. 그의 작품이 가지는 이러한 낯설고도 신선한 충격은 회화의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예술 장르를 맛보게 했다.

못은 그것이 가지는 물성의 특성상 산업적이면서 인공적인 도시의 상징적 오브제라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작가는 90년대 중반부터 프랑스의 작고 고풍스러운 보스(Beauce) 지방에 은둔 생활을 하면서 못을 사용하여 주위 자연을 담아내는 작업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그 작업은 부드럽고 온화한 동시에 강하고 파격적인 기운이 흘렀지만, 두 기운은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어냈다. 일반적으로 극과 극인 재료나 주제가 만날 때, 그 대립적 상황이 주는 긴장감과 파열음들이 감지되기 마련인데, 유봉상의 작업에서는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모니와 절제가 충만한 그의 작품에서는 동양의 정신성이 표출되고 있다. 작가는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바람의 흔적을 담은 숲과 자연 풍광, 한국의 풍경 및 먼 이국 땅의 도시 풍경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도 그리며 못을 박기 시작했다.

트롱프뢰유? 처음에 나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내 눈이 속았다고 생각했으나, 곧장 나의 생각을 바로 잡았다. 작가는 그가 바라본 세상을 그림을 통해 최대한 진솔하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결정화시켜 놓은 듯한 그의 작품 속의 자연이나 이국 풍경은 나에게는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선망의 장소로 보였다. 먼 발치에서, 그 갈망과 동경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앞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그것과 가까워졌을 때, 수 많은 못들이 반사에 의해 울렁이는 화려한 빛의 반짝임은 나로 하여금 한 순간 의문을 품게 했다. 픽셀화된 못 덩어리의 단단하고 뾰족한 표층 이미지가 내가 선망한 장소의 이미지인가?

이 질문을 뒤로하고 나는 곰곰이 생각해 결론을 내려 보았다. ‘유봉상의 작품은 나의 시각을 속이고 있지만, 동시에 나의 인식은 깨어나게끔 했다’고.  내가 확신했던 것이 의문으로 다가오는 순간 나는 조금 더 깊은 대상의 심층을 바라보게 되었다. 또한, 내가 바라본 그 심층이 확신으로 다가오는 순간 내가 알지 못했던 의문이 싹트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유봉상은 표층과 심층, 명확한 것과 명확하지 않은 것, 의식과 무의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과 정신, 확신과 의문 등 서로 대립하면서 존재하는 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아주 명상적으로 삶을 관조하게 만든다. 내 생각 속에 존재하는 리얼리티와 실제의 리얼리티는 서로 배반할 수 있다고……

 

 

 

홍성철

홍성철은 2000년 <White Cube> 전시를 시작으로 실험적인 작품을 해오면서 2010년부터 <Solid but Fluid>라는 주제 아래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홈페이지 hongsungchul.net에서 그가 현재까지 진행해 온 작업의 결과물과 방향성을 볼 수 있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작품 유형을 크게 Media Art, String 그리고 Blinker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Blinker, 즉 〈Perceptual Mirror_Blinker> 시리즈는 태양빛 집진소지를 통해 빛 에너지에 반응해 깜박임을 계속 반복하는 작은 크기의 직사각형 LCD 단자로 이루어져 있다. Media Art 와 String 작업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바탕으로 한다는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주제는 맥을 같이하고 있다.

홍성철의 미디어 아트 작품은 사람의 움직임이나 주변의 소리에 반응하는 영상을 작품화 하여 관객이 그의 작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반응하도록 한 인터액티브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작업이다. 이러한 그의 비디오 및 설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줄' string 이다. <White cube>와<String Tongue III>도 줄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움직임에 반응하는 센서를 사용하여 제작된 인터액티브 비디오 설치작품이다. <Cube Mirror〉는 줄들이 만들어낸 입방체에 관객들의 모습이 마치 거울처럼 투사된다. 2차원의 스크린이 아닌 3차원의 줄들이 만들어낸 입방체에 다양한 층이 형성되어 그 결과 영상이 맺어진다.

String 주제의 작품은 디지털 미디어 기반의 작업 속성을 아날로그적 매체로 귀환 시켜 만들어낸 유형이다. 작품의 전반적 구성은 줄(string)이다. <String Hand> 연작은 <Cube Mirror>과 비슷한 맥락의 작업이지만, 동적인 미디어 영상 작업이 아닌 정적인 사진 영상 작업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작업은 신체의 일부나 전체, 즉 인간의 몸이라는 점에서 미디어 작업의 주제와 맥을 같이한다. 실리콘 줄(string) 위에 손의 모양을 부분적으로 프린트한 후 여러 겹의 층(layer)으로 재조합 하는 과정에서 대상은 입체가 된다. 다양한 층으로 입체화된 이미지는 관람자가 어느 각도에 있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모양의 변화를 일으키며 상호작용한다. 작가는 미디어 설치 작업과 비슷한 방법으로 관객의 움직임을 유도하며 능동적인 방법으로 작품에 적극 참여 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관객은 한 순간도 고정되지 않는 이미지와 조우하게 된다. 입체적으로 빽빽이 들어선 줄들에 비치는 단단한(Solid) 실체로서의 신체를 보지만, 동시에 한 발 비껴서면 엉성하게 겹쳐진 줄 속에 그 실체가 부드럽게(Fluid) 분해되어 해체되어가는 신체를 접하게 된다. 단단함과 부드러움, 실재와 부재, 생성과 소멸의 이미지가 같이 존재하는 겹겹으로 중첩된 줄들의 층에서 작가는 무엇을 찾고자 했을까? 

신체는 홍성철의 작품에서 주제적 요소이다. 신체는 미술사를 통해 대상의 사회적 위치나 미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장치로 많이 사용되었지만, 현대 미술에서는 자아의 정체성과 인간의 실존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을 던질 때 많이 사용되는 주제이다. 그는 스스로 “‘나’ 라는 실체와 의미는 끊임없이 지연되고 연기될 뿐 끝내 붙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끊임 없이 자아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보이지 않는, 단단한 실체를 잡은 것 같았지만 한 순간 부드러운 액체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무언가(Solid but Fluid)가 바로 작가가 인식한 자기의 정체성 이었을 것이다. 확신하면서 의문하고, 의문하면서 확신하는 과정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줄의 물성이 작가, 더 나아가 인간의 실체가 아닐까?

작가가 언급한 ‘지연과 연기’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차연(差延, Différance)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실체는 궁극적으로 결정되거나 확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작가는 신체의 다양한 모습을 계속 생산해내면서 각인 시키고 있다. 단지 실체가 될 수 없는 <Solid but Fluid>한 신체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곧 확신해야 할 순간 질문해야만 하는 실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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